김덕근(1912)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
사망
이명
김원근(金元根)
묘소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김덕근은 1912년 9월 14일 전라남도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고향에서 신광학교를 졸업한 뒤 숙부이자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이던 김철의 지시에 따라 1929년 1월 상하이로 망명했다. 이후 1930년 한인소년동맹위원장에 피선되었으며, 1931년 7월에는 상해 교민단에서 설립한 한인청년당(韓人靑年黨)의 사교부장에 임명되어 한인 청년 당원 확보에 주력했다.

1932년 1월, 그는 화랑사(花郞社)를 창립했다. 화랑사는 신라의 화랑 정신을 계승하여 민족의식을 환기하고 교양을 목적으로 하였으며, 그는 단장에 선출되어 단원들과 함께 임정요인의 연락업무 및 비서역할 등의 업무와 통신사무를 전담하였다. 또한 선무반원으로서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선무 초모공작 활동을 전개하고 또한 임시정부와 불란서 영사관과의 연락책 및 통역원으로 근무하기도 하였다.

1932년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를 단행했다. 이후 일제의 검속이 강화되자, 그는 이규홍(李奎洪)과 함께 프랑스조계 거주의 한국인들에게 피난할 것을 알려줬다. 그러나 그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하고 다음날 안창호, 장현근과 함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안창호와 함께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20대의 젊은 학생이기 때문에 경성지방법원에서 기소유예처분을 받았으나, 전남 함평군 신광면 함정리에서 거주제한을 받고 살다가 8.15 광복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이후 서울로 거처를 옮겨 조용히 지내다 1980년 3월 1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덕근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95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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