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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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2.1. 조선의 외교관으로서 [편집]
나는 운 좋게 김가진이라는 조선의 거물 정치인과 잘 알고 지냈는데, 실내에서 항상 말총 두건을 쓰고 있는 그의 모습을 그려주기도 했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재기가 출중했으며, 내가 만난 수많은 훌륭한 외교관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외교관이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그를 쩔쩔매게 할 수는 없었다. 질문에 대답하면서 그보다 더 예리하고 철저하게 준비하여 대응하는 사람을 나는 일찍이 본 적이 없다.김가진은 다재다능할 뿐만 아니라 대단한 용기와 독립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왕의 측근 대부분의 간사하고 모함을 일삼는 관리들은 종종 그가 왕과 마찰을 일으키도록 유도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의 머리가 어깨 위에 붙어 있다는 사실이 매우 경이로운 일이라고 익살맞게 얘기했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했고, 다른 사람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새비지랜도어(Arnold H. Savage-Landor), 《한국 혹은 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Corea or Cho-Se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1895[3]
세도가 안동 김씨 출신이었으나 서얼 출신이어서 과거 응시를 할 수 없었고, 1877년 서얼들에게 허용된 관직인 규장각 검서관으로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하였다. 1883년 인천항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이 신설되자 유길준과 함께 주사로 임명되었다.
강직한 반청자주의 신념을 가졌기에, 리훙장의 기록에 따르면 1884년 고종과 명성황후를 알현한 면전에서 “조선은 러시아를 끌어들여 청나라를 배격하여 자주독립을 쟁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갑신정변 이후 적서차별이 철폐되자 1886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이 되었으나, 같은 해 청나라 배격을 위해 러시아와 밀약을 추진하다가 적발, 위안스카이의 압력을 받아 남원으로 유배되었다.
이후 유배에서 풀려나 청나라 톈진에 잠시 파견되었다가, 1887년 주일공사관이 개설되자 그를 눈여겨 본 고종의 특별한 낙점을 받아 초대 주일공사관 참찬관으로 일본행에 올랐다. 초대 공사 민영준이 국서만 일본에 전달한 뒤 그냥 귀국해버리자, 뒤이어 주일공사가 된 김가진은 공사관 개설부터 모든 외교 업무를 직접 처리하며 사실상 최초의 재외공관 주재 외교관으로 활동하였다.
이때 주일 청국 공사 리수창(黎庶昌)은 상국 공사에게 와서 부임신고를 하라는 뜻으로 김가진을 불렀다. 김가진은 이를 굴욕으로 여겨 안 가고 버티다가 1년만에 청국 공사관을 방문했는데,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김가진은 4년간 일본에 주재하면서 일본을 통해 서양 산업기계와 과학기술서적을 구해서 조선으로 보내고, 유학생들 뒷바라지에 애썼다. 울릉도에 불법으로 상륙해 나무를 베어가던 일본 목재업자들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기도 했다.
어느 날 청국공사 왕펑자오(王鳳藻)가 “동양의 독립국은 청국과 일본뿐”이라고 하자, 김가진은“조선은 오랜 역사와 사직(社稷)을 가지고 있는 독립국이다. 누가 황탄무계(荒誕無稽)하게 우리를 욕하고 타국에 예속되었다고 하는가?”라며 맞받아치기도 하였다.
1890년 10월에는 일본 외무대신 아오키 슈조(靑木周藏)가 김가진에게 수 년 전 남대문에 “조선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라는 방문이 걸린 일을 상기시키며, 조선은 반독립국(半獨立國)이 아니냐고 넌지시 물었다. 이때 김가진은“조선은 요(堯) 임금 때부터 국가와 임금이 있었다. 설혹 중국에 패하였더라도 이제까지 한 번도 지배받은 적이 없다. 중국과의 사행(使行, 책봉과 조공을 위한 사신행차)은 실익(實益)은 조선이 챙기고 중국은 명분만 가져간다. 조선국왕은 일언일령(一言一令)도 자주(自主)한다.”라는 말로 맞서기도 하였다.#
2.2. 대한제국 대신으로서 [편집]
2.3.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로서 [편집]
1910년 경술국치 때 일본에게서 조선귀족 남작 작위를 받았으나, 그의 행적은 일본에 설설 기며 호의호식하는 다른 조선귀족과는 달랐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10월 의친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몰래 망명시키려 준비했다가 중간에 발각되었고,기왕 들킨 거 눈치 볼 것도 없겠다 아예 아들 김의한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이후 임정과 김좌진이 지휘하는 북로군정서의 고문으로 활동했다.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 운동에 뛰어든 용자. 한국의 조선귀족 중엔 정말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는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이 아니어서 죽어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192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김가진은 독립 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국가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자신은 작위 문제 등으로 서훈은 받지 못했으나,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을 서훈을 대신 주었으니 어느 정도 독립운동의 결실은 이룬 것.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김가진은 등재하지 않았다.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나자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기획한 조선민족 대동단의 총재로 추대되었으며, 그해 10월 의친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몰래 망명시키려 준비했다가 중간에 발각되었고,
1920년 3월에는 대동단 총재 명의로 포고문·통고문을 배포했으며, 대동단의 박용만(朴容萬)·나창헌(羅昌憲)·손영직(孫永稷)·고광원(高光元) 등과 공동명의로 갹금권고문(醵金勸告文)을 발표하였다. 조선총독부는 그를 회유하고자 상하이에 밀정을 보냈으나 거절당했다.
분명 평생 호의호식할 수 있는데 그 기회를 스스로 내다 버리고 독립 운동에 뛰어든 용자. 한국의 조선귀족 중엔 정말 특이한 케이스에 속한다. 다만 일제로부터 받은 남작 작위는 공식적으로 박탈된 것이 아니어서 죽어서도 계속 유지되었다.
1922년에 세상을 떠났으며 그의 장례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의해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김가진은 독립 운동을 하다 순국하였으나 남작 작위를 일제에 '공식적으로' 반납하지 않았다는 석연찮은 이유로, 국가 보훈처는 독립유공자 서훈을 보류했다. 다만 그 아들인 김의한과 며느리 정정화는 독립 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자신은 작위 문제 등으로 서훈은 받지 못했으나,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을 서훈을 대신 주었으니 어느 정도 독립운동의 결실은 이룬 것. 또한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도 그의 항일 행적을 인정하여 사전에 김가진은 등재하지 않았다.
3. 독립문 글씨의 진짜 주인인가? [편집]
우리 집안에서는 당연히 할아버님(동농 김가진·1846년 ~ 1922년) 글씨로 알고 있습니다. 강단이 남달랐던 어머니(정정화·1900년 ~ 1991년)의 회고록 장강일기에도 한문과 한글 현판을 정성 들여 쓰셨다고 나와 있고요. 어머니는 홀로 상하이에 건너가 시아버지를 모셨어요. 할아버님은 1903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계셨을 때, 비원 감독직을 맡아 창덕궁 모든 현판 글씨들도 쓰셨습니다.
- 중앙SUNDAY 2010년 9월 18일자 기사 <일제의 만행 증언하는 사형장 앞 ‘통곡의 미루나무’> 중에서
그러나 위와 같이 당사자 후손들의 증언이나 기록은 객관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중앙SUNDAY 기사에서 제3자인 서예 전문가 김선원은 독립문의 ‘문 문(門)자’와 ‘설 립(立)자’의 체형을 조목조목 짚어가며 단언했으며, 이완용 글씨로 알려진 경복궁 함원전(含元殿) 현판 글씨도 마찬가지라고 지적했다. 이로써 그는 완숙한 독립문 글씨와는 체형과 서법이 다르다고 전했다.
그 증거로 김가진이 1903년에 창덕궁 후원의 감독을 맡아 쓴 몽룡정, 부용정, 애련정, 희우정, 금마문, 폄우사, 운경거 등의 편액 역시 전부 글씨체가 뭉텅하며 예리하지 않은 스타일이다. 이는 독립문 편액 글씨체와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미스테리를 풀 핵심인 독립문의 한글 현판은 현재 김가진이 쓴 한글 친필이 전무한 관계로 '비교의 대상'은 한문 편액밖에 남지 않는다.
또 독립협회는 출범 뒤 모화관을 '독립관'으로 바꾸면서 현판을 내걸었는데, 현재 현판은 전해진 것이 없으나 1897년 5월 25일 독립신문 잡보에 따르면 태자 시절의 순종황제가 썼다. 또 1898년 1월 25일자 독립신문 잡보에선 당시 황해도 관찰사인 김가진이 독립문에 관심을 지녔을 것이라는 내용도 나온다.
4. 갤러리 [편집]
대례복을 입은 모습 | 상하이 임시정부 망명 때 | 백운장에서 | 관직 생활 때 모습 | 관복을 입은 모습 |
노년의 모습 | 대례복 초상화 | 김가진 초상화[7] | ||
5. 대중매체에서 [편집]
- 1995년 KBS1 대하드라마 <김구>에선 대배우 이낙훈이 연기했다.
- 대체역사소설인 폭군 고종대왕 일대기에서는 조선의 역사가 변하면서, 그가 가게 될 행보도 변화하게 된다.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면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유사해질 듯. 거기다가 김가진의 딸과 흥영군 이우가 혼담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혼담이 오간 것이 확실히 이우인지는 불분명하다(이우 밑으로도 의친왕의 아들이 많다. 공식적인 의친왕의 자녀는 12남 9녀). 조선귀족으로 남작의 작위를 받았지만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망명한 그는 의친왕과 친분이 있었고,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려는 사건에 가담하기도 하였는데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는 《녹두꽃》에서 "시아버님은 당시 의친왕과 친근한 사이였으며, 사돈까지 맺기로 약속된 관계였다. 시누이 김영원이 한때 의친왕의 차남[8]과 약혼했던 사이였는데,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이 실패로 돌아간 후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 혼사가 깨진 것은 어쩌면 일본인들의 압력에 의한 것일 수도 있다."라고 회고하였으며, 김가진의 손자 김자동의 인터뷰에 따르면 "나라가 망한 후에 의친왕과 서로 흉금을 털어놓고 나라 걱정을 하였고 친분이 있었지요. 의친왕의 아들이 많죠. 어떤 아들인지는 모르겠는데 의친왕 아들하고 작은 고모하고 약혼까지 했대요."라고 인터뷰한 내용은 있다.
6. 둘러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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