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암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성명 | 권철암(權鐵巖) |
생몰 | |
사망지 | |
매장지 |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
추서 | 건국훈장 애족장 |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권철암은 1901년 5월 10일 경상도 동래군 기장면 덩블;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월 13일 김수문(金守文)이라는 마부(馬夫)가 주워 온 서울의 독립선언서를 김도엽·최기복·구수암·김수룡(金壽龍)·이택규(李澤奎)·박공표(朴孔杓) 등과 함께 남문 앞 축구장에서 함께 읽어봤다. 이후 그들은 기장읍 장날인 4월 5일 오전 11시를 기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3월 28일 그는 김도엽·김수룡과 함께 기장 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또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 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 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오전 11시, 권철암은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후 그는 4월 8일, 10일, 11일에 걸쳐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래에서 옥고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6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철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3월 28일 그는 김도엽·김수룡과 함께 기장 면사무소의 재무서기인 최창용(崔昌鎔)으로부터 면사무소의 등사기와 원지 14매를 얻어서 장관청(將官廳)에서 4백여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였고, 또 김도엽이 「양심발원인도적 자유민족(良心發原人道的自由民族)」이라고 혈서한 큰 기와 대형 독립기도 제작하였다.
4월 5일 오전 11시, 권철암은 다른 주동자들과 함께 장터에 나아가 혈서와 독립기를 장터 복판에 꽂아두고, 1백여명의 시위군중에게 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준 뒤, 그들의 선두에 서서 독립만세를 외치며 함께 장터를 시위행진하였다. 그러나 곧 출동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군중은 해산하였다.
이후 그는 4월 8일, 10일, 11일에 걸쳐 시위를 전개하다가 일제의 검속으로 체포되었으며, 이해 6월 1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소위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 6월형이 확정되어 부산감옥에서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동래에서 옥고 후 후유증에 시달리다 1936년 6월 18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6년 권철암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7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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