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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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궁지 | |
1. 개요 [편집]
2. 고려왕조 [편집]
무신정권 집권자 최우가 주도해 지었고 몽고와 전쟁 당시 본궐과 별궁 일대로 쓰였다.
13세기, 고려와 몽고와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고 몽고의 침입이 거세지자 당시 권신 최우는 자신이 실각할 것이 두려워 임금을 데리고 도망치기로 결정했다.고종 재위 19년(1232년) 2월에 최우는 조정의 원로를 모아 천도를 의논했고 5월까지 계속 논의하다 결국 6월, 최우는 먼저 강화도로 간 뒤, 고종을 소환한다. 천도 논의에서 고종이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미상이지만 임금을 제멋대로 불러댄 당시 최우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6월 말, 고종은 강제로 강화도로 갔고 아직 살아있던 희종의 왕후 등 왕족이 따라갔다. 세조 위무왕, 태조 신성왕의 묘지를 강화도로 이장했다. 당시 양광도(楊廣道) 강화현(江華縣)이었던 강화도의 주소를 바꾸어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으로 올렸다.
개경은 그래도 오랫동안 수도였던 만큼 완전히 버리지 못해 강도로 옮겨간 귀족, 고위 관료 등 고위층을 계속 개경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1248년에 멈추면서 개경은 초토화가 된다.
2년 뒤 재위 21년(1234년) 1월에 최우는 각 도에 사람을 뽑아 궁궐과 성곽을 쌓았다. 2월에 본궐, 별궁, 관아, 대전, 침전, 편전 등을 완공하였고 이 때는 개경에 있던 궁과 원의 이름을 그대로 따다 붙혔다.
재위 37년(1251년)에 강도로 천도한지 19년만에 겨우 임금의 가마가 완성됐고 호위대가 편성되었다. 그전까진 고종은 말을 타거나 임시 가마에 들려서 군인들의 무작위 보호 하에 있었는데 이제서야 가마와 호위대가 정비된 것이다. 얼마나 나라가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270년 몽골 제국과의 화친으로 다시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일부만을 남기고 궁궐과 편전, 성곽은 철거되었고 일부 부전(副殿)만이 남아있다.
13세기, 고려와 몽고와의 사이는 갈수록 나빠졌고 몽고의 침입이 거세지자 당시 권신 최우는 자신이 실각할 것이 두려워 임금을 데리고 도망치기로 결정했다.고종 재위 19년(1232년) 2월에 최우는 조정의 원로를 모아 천도를 의논했고 5월까지 계속 논의하다 결국 6월, 최우는 먼저 강화도로 간 뒤, 고종을 소환한다. 천도 논의에서 고종이 얼마나 관여했는지는 미상이지만 임금을 제멋대로 불러댄 당시 최우의 권력은 상상을 초월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6월 말, 고종은 강제로 강화도로 갔고 아직 살아있던 희종의 왕후 등 왕족이 따라갔다. 세조 위무왕, 태조 신성왕의 묘지를 강화도로 이장했다. 당시 양광도(楊廣道) 강화현(江華縣)이었던 강화도의 주소를 바꾸어 강도(江都) 강화군(江華郡)으로 올렸다.
개경은 그래도 오랫동안 수도였던 만큼 완전히 버리지 못해 강도로 옮겨간 귀족, 고위 관료 등 고위층을 계속 개경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1248년에 멈추면서 개경은 초토화가 된다.
2년 뒤 재위 21년(1234년) 1월에 최우는 각 도에 사람을 뽑아 궁궐과 성곽을 쌓았다. 2월에 본궐, 별궁, 관아, 대전, 침전, 편전 등을 완공하였고 이 때는 개경에 있던 궁과 원의 이름을 그대로 따다 붙혔다.
재위 37년(1251년)에 강도로 천도한지 19년만에 겨우 임금의 가마가 완성됐고 호위대가 편성되었다. 그전까진 고종은 말을 타거나 임시 가마에 들려서 군인들의 무작위 보호 하에 있었는데 이제서야 가마와 호위대가 정비된 것이다. 얼마나 나라가 혼란스러웠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1270년 몽골 제국과의 화친으로 다시 수도를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면서 일부만을 남기고 궁궐과 편전, 성곽은 철거되었고 일부 부전(副殿)만이 남아있다.
2.1. 주요 건축 [편집]
2.1.1. 외성(外城) [편집]
고종 재위 24년(1237년) 고려사는 이 해에 강화외성(江華外城)을 쌓았다고 한다. 개경 본궐의 나성(羅城)과 같은 역할의 성이다.
2.1.2. 중성(中城) [편집]
2.1.3. 내성(內城) [편집]
처음 강화도로 왔을 때 최우가 쌓은 성으로 보이며 고려사에선 강도내성(江都內城)이라고 했다. 개경 본궐의 궁성(宮城)의 격인듯 하다.
2.1.4. 궁궐 [편집]
- 본궐
강도에 지은 정궁(正宮). 개경에 있는 본궐을 그대로 따라 지었다. 본궐을 그대로 베껴 왔으므로 이름이 없다. 총 36년간 법궁 기능을 했다.
- 수창궁
강도에 지은 별궁(別宮). 개경에 있는 수창궁을 그대로 따라 지었다.
- 태자궁
- 여정궁(麗正宮)
여정궁은 개경 본궐 태자궁의 명칭이다. 즉 태자궁인 듯 하다.
- 용암궁(龍巖宮)
- 제포궁(梯浦宮)
강도에 지어진 별궁. 제포에 있어서 제포궁인 듯 하다.
- 서궁(西宮)
강도에 지어진 별궁. 본궐 기준 서쪽에 있어서 서궁인 듯 하다.
- 금단동궁(今旦洞宮)
강도에 지어진 별궁. 금단동궁은 특정 이름이 아니라 금단동에 있는 별궁이란 뜻인 듯하다.
- 장봉궁(長峯宮)
2.1.5. 기타 건축 [편집]
제2정전인 대관전 등 강도(江都)로 천도 후 대부분 건축에 개경 건축물의 이름을 붙힌 듯 하다.
- 구정(毬庭)
넓은 광장. 개경엔 승평문 뒤에 있었으니 강도에서도 승평문 뒤에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곳에서 도교 초제를 지낸 적이 있으며 동국이상국집 전집 제40권에 축문이 남아있다. 축문에선 고려를 천부(天府), 개경을 금성(金城), 강도를 천부의 오구(天府之奧區)로 표현했다.
- 승평문(昇平門)
개경 본궐에 있던 궁궐의 남대문이자 정문. 강도에 그 양식 그대로 지었다고 한다. 최이가 진양후가 되어 진양부를 받자 관저를 크게 짓기 위해 곳곳에서 쇠, 기외, 잣나무 등을 수집했고, 사람들이 매우 고통스러워 했다. 사람들은 이를 비난하기 위해 승평문에다가 이런 글귀를 써놓았다고 한다.
'人與栢孰重!'
'사람과 잣나무 중에 어느 것이 더 소중한가!'- 고려사 최이 열전 中.
- 강안전(康安殿)
개경 본궐에 있던 편전. 강도 본궐에 복붙. 최씨 일가가 실각했을 때 고종은 이 곳에서 마치 처음 즉위할 때처럼 축하받았고, 원종이 여기서 즉위했다.
- 약사전(藥師殿)
2.1.6. 사찰 [편집]
- 묘통사(妙通寺), 왕륜사(王輪寺), 흥국사(興國寺), 현성사(賢聖寺), 봉은사(奉恩寺), 건성사(乾聖寺), 복령사(福靈寺)
강도에 다시 지은 사찰들. 개경에 있는 사찰들을 그대로 따라 지었다.
- 구요당(九曜堂)
도교 사당으로 도교 신들을 모셨다. 강도의 외제석원에 위치했다고 한다. 당연히 개경 구요당을 복붙.
2.1.7. 기타 건물 [편집]
- 제포관(梯浦館)
사신 등을 접대하던 객관. 제포에 있어서 제포관이다.
- 곤릉(坤陵)
고종의 모후 원덕태후의 능.
고종 안효왕의 능.
- 창릉(昌陵)
세조 위무왕의 능. 만월대에서 이장되었으며 다시 환도할 때 원 자리로 돌아갔다.
- 현릉(顯陵)
태조 신성왕의 능. 만월대에서 이장되었으며 다시 환도할 때 원 자리로 돌아갔다.
- 국자감(國子監)
- 대장경판당(大藏經板堂)
- 태묘(太廟)
강도로 천도 했으니 당연히 태묘도 옮겨 지었다. 최항이 사비를 들여 크게 지었다고 한다. 고종 재위 41년(1254년)에 고종은 종묘에 크게 제사 지내며 제발 나라를 도와달라며 빌었다. 이 때의 기도문이 고려사에 아직 남아있는데 몽골을 "멍청하고 시커먼 북쪽 오랑캐 사람(蠢黑狄之人)"이라고 불렀다.
- 경령전(景靈殿)
태조의 어진을 모신 전각. 태조와 신혜왕후, 국왕의 4대조 내외의 어진을 모셨다. 개경의 경령전 제도를 가져 온 것이다.
- 대학(大學)
고려의 학교. 최항 묘지명엔 최항이 사비를 들여 크게 지었다고 한다.
3. 조선왕조 [편집]
3.1. 강화유수부 [편집]
3.2. 강화행궁 [편집]
4. 대한민국 [편집]
2000년대에는 외규장각을 복원하였다. 최근 연구에 의해 고려궁지의 위치가 현 위치인가에 대해서 논란이 있다. 고려왕궁 건물지나 관련 유물이 전혀 발굴되지 않았기 때문.
5. 기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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