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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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생애 [편집]
강제형은 1888년 3월 28일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죽전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무렵 용덕면 면장을 맡던 그는 구여순, 이화경(李華卿), 정용식(鄭容軾), 최정학(崔正學), 이우식(李祐植), 김봉연(金琫淵) 등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등사해 줄 것을 요청받자 흔쾌히 승낙한 후 면서기 전용선, 최병규 등에게 면사무소의 기재를 이용하여 수백 매의 독립선언서를 등사하도록 지시했다. 이윽고 3월 14일 오후 1시, 그는 군중과 함께 의령 장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의령공립보통학교 학생 3백여명이 가세하였고, 인근의 주민들이 계속 모여들어 시위군중은 점차 3천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에 그는 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후 자진해산했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 앞에 모인 1,500명의 군중과 홤께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경찰서와 군청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이화경, 이원경(李源卿), 최숙자(崔淑子), 강순이(姜順伊)의 주동하에 여성들도 합세했다. 그러나 마산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파견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고, 진주재판소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26년 10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강제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에 그는 군중과 함께 장터와 읍내를 행진하고 경찰서 앞에 이르러 독립만세를 외친 후 자진해산했다. 이튿날, 그는 다시 의령향교 앞에 모인 1,500명의 군중과 홤께 비가 내리는 와중에도 경찰서와 군청을 행진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때 이화경, 이원경(李源卿), 최숙자(崔淑子), 강순이(姜順伊)의 주동하에 여성들도 합세했다. 그러나 마산 주둔 일본 포병대대에서 파견된 8명의 일본군과 현지의 일본 경찰이 총검을 휘두르며 군중을 위협하여 해산시키고 주동자를 검거하기 시작했다. 이때 그도 체포되었고, 진주재판소에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뒤 출옥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26년 10월 24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강제형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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