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달모

최근 수정 시각: (5년 전)
출생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동사리[1]
사망
본관
[[진주 강씨]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목차
1. 개요2. 생애

1. 개요 [편집]

한국의 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2. 생애 [편집]

강달모는 1909년 4월 4일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면 동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광주사범학교에 재학중이던 1927년 4월에 조선인 학생들을 차별대우하던 일본인 교유(敎諭) 강전(江田)을 타교로 몰아내는 데 참여했고, 1928년 3월에 선배들이 졸업한 뒤 뒤를 이어 교내학생 운동 간부로 선임되었다. 1929년 5월에는 장석천, 김기권, 김보섭(金普燮) 등과 함께 학생소비조합의 설치에 대하여 협의했다.

1929년 6월 도쿄에서 돌아온 장재성(張載性)은 각 학교 학생 대표들을 소집해 독서회 중앙본부를 조직했다. 이때 강달모는 윤창하(尹敞夏)와 함께 재정부위원으로 선임되어 동회의 회비 징수 및 회계 사무를 맡았다. 또한 독서회 중앙본부는 그 하부조직으로 각 학교 독서회를 설치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강달모는 1929년 7월에 수피아여학교 뒷산에서 박노기, 송동식·이신형(李信珩)·김재용(金在瑢) 등과 모여 비밀결사의 조직에 대하여 협의하고 동년 9월 광주형무소 뒷산에서 다시 모여 광주사범학교독서회를 조직하고, 부서 및 결의사항을 정했다. 이때 그는 재정부위원장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그는 항일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인쇄물을 인쇄물을 임종근(林鍾根)으로부터 교부 받아 이를 각 독서회원에게 배포했다. 그러다가 1929년 11월 3일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발하자 이에 참가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고, 1930년 10월 광주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 6개월을 언도받고 항소를 제기한 뒤 1931년 6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나주에서 평범하게 살았으며, 1975년 9월 16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강달모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1] 인근의 대교리·교촌리와 함께 진주 강씨 집성촌이다. 독립유공자 강유진도 이 마을 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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