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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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erre-Joseph Proudhon 피에르 조제프 프루동 | |
출생 | |
사망 | |
1. 생애 [편집]
최초로 스스로를 아나키스트라고 칭한 인물.
통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9세 때 목동이 되었다. 중등학교는 다녔으나 경제적 부담으로 대학 입학 시험(바칼로레아)를 볼 수 없었다.[1] 이후,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하였다. 또한 많은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38년 프루동은 장학금을 받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에서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소유자에 대한 경고》로 인해 재판을 받았으나 석방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어 1852년 석방됐다. 생트펠라지에서 외프라지 피에가르(Euphrasie Piegard)와 결혼했으며 《혁명가의 고백》과 〈민중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다. 1858년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였으며 이때 톨스토이를 만난다. 1862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소유의 이론》과《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를 썼다. 1865년 갑작스레 사망한다.
통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9세 때 목동이 되었다. 중등학교는 다녔으나 경제적 부담으로 대학 입학 시험(바칼로레아)를 볼 수 없었다.[1] 이후, 인쇄소에서 기술을 배우면서 다양한 독서를 할 수 있었고, 라틴어, 그리스어, 히브리어를 독학하였다. 또한 많은 사회주의 지식인들과 친분을 쌓았다. 1838년 프루동은 장학금을 받아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는 《소유란 무엇인가?》(What Is Property?)에서 소유를 도둑질이라고 규정하였으며 《소유자에 대한 경고》로 인해 재판을 받았으나 석방되었다.
1848년 혁명 이후,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민중〉(Le Peuple)지에 나폴레옹 3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가 3년의 징역과 3,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고 벨기에로 피신했다. 파리에 돌아와 체포되어 생트펠라지 감옥에 투옥되어 1852년 석방됐다. 생트펠라지에서 외프라지 피에가르(Euphrasie Piegard)와 결혼했으며 《혁명가의 고백》과 〈민중의 목소리〉를 썼으나 다시 기소되어 다른 감옥으로 이송된다. 1858년에 로마 가톨릭교회를 비판한《혁명과 교회의 정의론》으로 다시 3년의 징역과 4,000프랑의 벌금을 선고받아 브뤼셀로 피신하였으며 이때 톨스토이를 만난다. 1862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서 《소유의 이론》과《노동계급의 정치적 역량에 대해서》를 썼다. 1865년 갑작스레 사망한다.
2. 사상 [편집]
2.1. 프랑스 혁명 비판 [편집]
당시 프랑스 대혁명을 왕정에 의한 1인 독재에서, 민주정에 의한 다수의 독재로 전환한 것에 불과하다며 비판하였다. 또한 정치제도에 대한 혁명은 이루어졌으나, 재산제도에는 손을 대지 않은 점도 비판하였다.
2.2. 사유재산 제도 비판 [편집]
"모든 사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다."
"모든 재산은 도둑질한 것"이라는 명언에서 볼 수 있듯이. 소유 자체를 죄악시하였다. 일체의 부는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고, 이것이 누적되어 자본이라는 개념으로 발전했을 뿐, 거슬러 올라가면 자본은 몇 세대에 걸쳐 도둑질한 것일뿐이라며 모든 재산을 사회에 귀속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3. 마르크스와의 비교 [편집]
여러모로 마르크스와 비교되는 점이 많다.
- 프루동이 "빈곤의 철학"이란 책을 쓰자, 마르크스는 이를 비꼬아 "철학의 빈곤"이라는 책을 썼다.
- 마르크스는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고, 귀족과 결혼했으나, 프루동은 가난한 제조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재봉사와 결혼했다.
- 마르크스는 정치적 동지 엥겔스의 후원을 받아서, 그리 생계에는 곤란을 겪지 않았으나, 프루동은 죽을 때까지 끼니 걱정을 하며 살았다.
- 마르크스는 혁명에 의한 변화를 추구했으나, 프루동은 기존의 자본가 세력을 설득하여 제도적인 변화를 이끌어내고자 했다.
- 마르크스는 혁명의 과정에서 무산 계급 독재가 필연적임을 주장하였으나, 프루동은 거의 모든 권위를 부정적으로 보았다.
- 마르크스는 체계적인 이론 정립에 집착하였으나, 프루동은 자신의 이론에 체계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였다.
- 마르크스는 의외로 투옥된 적이 없다. 프루동은 말년 대부분이 수배 기간 아니면 투옥 기간이었다.
4. 어록 [편집]
“프루동은 우리 모두의 스승이다(Proudhon is the master of us all).” - 미하일 바쿠닌
“나는 가난하고, 가난한 자의 아들이다. 나는 가난한 이들과 일생을 보냈으며, 십중팔구는 가난하게 죽을 것이다.”
"내가 '노예제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그리고 한마디로 답해야 한다면, '그것은 살인이다'라고 답을 할 터인데, 내 뜻은 즉시 이해될 것이다."
5. 여담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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