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진도독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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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편집]
2. 역사 [편집]
660년, 신라와 함께 백제를 멸망시킨 후 당은 종전까지 5부(部) 37군(郡) 200성(城) 76만 호(戶)로 구성되어 있던 백제 땅을 다스리고자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5개의 도독부를 세웠으며[1], 그중에서도 옛 백제의 수도권이었던 웅진, 즉 지금의 공주 지방에 세워진 웅진도독부가 5도독부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5도독부는 마치 현대 대한민국이 지정한 이북 5도처럼 명목상 설치한 것이었고, 실질적으로 당나라가 통치하는 것은 옛 백제 영토 중에서도 웅진, 사비의 도독부뿐이었다. 나머지 백제의 각 지방, 예를 들어 덕안(德安, 충남 논산시 일대로 비정) 등 여러 지역은 한국과 일본의 사료를 종합해 볼 때 백제 부흥군 잔존 세력이 지배하다가 일찍이 신라가 차지하고 있어 웅진도독부의 실제 통치력이 닿지 못하고 있다. 이후 행정 구역 개편을 통하여 5도독부는 해체되고 안동도호부와 동급의 웅진도호부로, 그 직후 안동도호부 치하 웅진도독부가 백제를 통치하는 총독부로 격하·재편되어 그 밑에 7주와 52현을 두었다.
3. 백제부흥운동? [편집]
이렇게 새로 개편된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임명된 인물은 바로 의자왕의 태자였던 부여융(扶餘隆). 그 이전에는 당나라 장수 유인궤가 도독을 맡았었는데, 부여융이 도독으로 임명된 건 당연히 백제유민들의 반발을 달래기 위해서다. 웅진도독부 백제는 당의 지방통치체였으나 한편으로는 당의 괴뢰 위성국으로서나마 부활한 백제로서의 일면을 지니고 있는데 이를 당의 이민족 통치체제인 기미제도라 일컬으며 당시 백제뿐 아니라 서역 등 다른 곳에서도 활용하던 전략이었다. 이러한 성격으로 웅진도독 백제를 부여풍의 백제부흥운동의 한 범주에 포함시키도 한다. 이 관점에 따르면 부여풍의 반당, 친일본적 성향의 백제부흥운동이 부여융의 친당 반신라적 백제부흥운동으로 전환되어 존속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백제 멸망 직후 수년간 벌어진 백제부흥운동과 나당전쟁의 혼란으로 인해 통치는 말 그대로 형식적인 선에서 끝났으며, 신라는 웅진도독부를 '백제'라고 불렀고, 사실상 백제가 당나라의 꼭두각시로서 부활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크게 반발했고 나당전쟁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4. 건안성으로 옮겨지다 [편집]
670년부터 문무왕은 대대적으로 백제의 고토를 공격해 당나라를 축출해내는데 성공함에 따라 웅진도독부는 철폐되고, 기구 자체는 백제와 별 관련이 없는 고구려의 옛 영토인 요동 지역의 건안성으로 명목상 옮겨진다. 이곳에서도 부여융은 백제 멸망 직후(660년) 당나라로 강제이주당한 백제계 유민들 약 1만 명을 통치했다. 당나라가 한반도 흡수의 전초기지 목적을 가지고 야심차게 출범시켰던 웅진도독부는 만주 내 백제유민들의 자치기구 정도로 그 성격이 변하게 된다. 그래서 당나라에서는 이 웅진도독부를 '소 백제'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이 소 백제는 추후 소고구려나 발해에게 통합된다.
5. 구성 [편집]
현재의 지명에 비정하는 것은 거의 전부 추측이다.
- 7주: 백제의 지방 지역을 나누기 위해 설치
6. 역대 웅진도독 [편집]
6.1. 역대 대방군왕 [편집]
7. 함께 보기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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